방송인 고이정환

방송인 고이정환이정환 방송인 출생, 1937년 12월 7일 충청남도 아산사망 2013. 5. 30. 학력사항 중앙대학교 경복고등학교사망 2013. 5. 30. 학력사항 중앙대학교 경복고등학교케이후쿠 고등 학교(31회)를 졸업하고 중앙 대학교 법학과를 중퇴한 뒤 음악 감상실”디시에네”의 DJ로 활동하는 1964년 MBC라디오 PD로 입사했다.당시는 음반이나 테이프조차 구하기가 어려웠다 1960년대였지만 이 음악 감상실이 그래도 팝 음악이나 클래식을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찻집과 결합된 형식으로 고객이 신청곡을 보내면 DJ가 구라를 떨며 흘리고 주는 방식.현재 라디오 프로그램과 형식이 비슷하다.영화 『 위험한 상견례 』과 『 품행 제로 』 등을 보면 안다.당시도 가요의 경우는 그래도 국내에서 앨범이 나왔지만, 팝과 클래식은 라이선스 판이 거의 없던 그 시대였고 수입 원판은 제대로 된 국내 유통 경로도 없고 가격도 비싸서 구하기가 어렵고 미 8군 등을 통해서 나오는 앨범 등으로 신보에 접한 시기였다.물론 당시 이른바 전축으로 불린 오디오의 보급률도 낮았기 때문이기도 하다.중퇴생이라고 해도, 당시 대학의 물을 마신 사람이 DJ로 활동한다는 것이 매우 이례적으로 그것에서 꽤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아시다 시피, 1950년대는 대학 진학률이 10%에도 미치지 않는 시대다.게다가 당시는 고졸도 드물었다.중앙 대학교가 2020년대의 현 시점에서도 들기 쉬운 학교는 아니지만 당시 이…존 팬들은 현재 최고 명문대 출신 연예인의 프리미엄의 같은 것을 가진 셈.그러나 매우 어려운 시대여서 학교 위상은 별로 좋은 것이 없었다.이 때는 오히려 케이후쿠(경복 고등 학교는 일류 학교 출신이 DJ를 하지만 그것이 더 신기한 생각이 들정도이다.그래서 아마도 중퇴한 것이다.비슷한 예로 원로들 연기자의 신·구가 있다.경기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대학교에 2번이나 응시했으나 모두 탈락하고 결국 성균관 대학교에 진학했으나 이마저 중퇴했다.이유는 마찬가지로 학비보다[4]대졸자의 이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마찬가지로, 이종환(이·존 팬)도 케이후쿠(경복)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중앙 대학교에 진학했다고 하면 정황 상 전 분기 때 서울대에 진학하려고 내리며 대신 후기 때 중앙대에 들어갔을 것이다.그러나 케이후쿠(경복 고교를 졸업하거나, 중앙대를 졸업하거나 큰 이점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엄청난 학비를 내느니 오히려 중퇴했을 가능성이 높다.1950년대 당시는 연예인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아 사회 전반적으로 낮은 학력 사회이기 때문에 고학력 연예인이 드물었다.대학을 나온 사람을 따로 부른다”학사 가수”라는 명칭이 나올 정도이다?대졸 정도면 방송국의 실력자들과 어느 정도 대화가 통했기 때문에 특별한 취급을 받으며 자신의 계통에서 권력을 휘두르기 쉬웠다.당시 학사의 지위는 현재의 SKY대학 석사, 다른 대학 박사쯤으로 보면 된다.비슷한 예로 배우 오·지묘은이 있지만 역시 안 좋은 소문이 많다.DJ를 연예인이 아닌 방송인으로 보더라도 당시의 방송국 직원의 지위도 지금과는 다르다.지금은 소위 언론 고시로 불릴 만큼 방송사 직원의 직업적 지위가 크지만 80년대 초의 컬러 텔레비전 시대 이전까지는 기자 직종을 제외하면[5] 다른 부문의 직종은 지금만큼 인기 직종이 아니었다.이·정환과 동 시대의 DJ로 활약한 팬·잉용이 어느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있다.물론 나를 낮추는 겸손함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70년대까지는 방송사의 월급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고 한다.[6]이종환은 이후 다양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와 프로듀서를 맡고, 더러는 동시에 DJ와 PD를 겸임하기도 했다.당시 팝송을 소개할 역량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이·존 팬들은 중퇴했지만 대학도 다닐 정도로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고등 교육도 받은 사람이기에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그러나 이쪽 업계가 그렇듯, 1980년대에 그의 방송을 들은 사람이 본격적으로 인터넷 시대에 들어가면 그가 얼마나 요란을 떨었는지 알게 됐다는 평가가 많다.즉 잘 모르는 얕은 팝송 실력을 갖고 전문가인 듯 행세했다는 것.팝송에 대한 정보 접근이 미 8군에서 나오는 미국의 잡지가 전부였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었던 측면도 있지만 그래도 그 시절 해외 언론에 접할 수 있는 방송국에 있었기 때문에, 귀빈인 체하기에 더 공부가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이 사람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전문가 인양한 것은 잘 보기 어렵다.물론 대한민국은 당시 모든 면에서 그랬다.방송계도 그랬으나 학계는 더 심했다.이런 면이 개선된 것은 역시 2000년대에 들어서니 당시의 시대의 한계로 조금 실드는 치실지도 모른다.이종환만 아니라 당시 팝 전문가인 양 행세하는 DJ, 예를 들면 김광 한, 김기덕도 마찬가지다.그들의 방송을 듣고 자란 60~70년 대생들은 인터넷 시대에 해외 유학에서 정보 접근이 확산되면서 그들이 그 당시 전혀 전문가라고는 볼 수 없는 얄팍한 지식으로 전문가인 양 행세하는 것을 알게 됐다.[7][8]그러나 당시 한국은 모든 면이 그랬으니 그들을 비난보다는 시대의 한계라고 봐야 한다.이때부터 그는 “연예계의 밤의 대통령”의 역할을 했지만 대부분의 연예인의 생사여 탈권을 쥐고 가꾸거나 혹은 죽이기도 했다.이른바”이·존 팬 사단”로 불리는 연예인이 나타난 것이 이 무렵이었다.그들의 일부가 바로 일명”세 시 연봉 트리오”라고 불리는 윤·현주, 송·챠은식, 김·김세환 등.”쉘 불”이라는 음악 다방을 직접 경영하는 등 사업적인 활동도 했지만 명동에서 명품 구두 가게를 하던 시기에는 자신들의 사단을 동원하고 홍보 활동을 했다.문제는 이런 일이 거의 강압적이고 무보수였다는 소문이 많다.1980년대 초, 전두환(정·두한)대통령이 집권한 뒤 한동안 로스 앤젤레스로 이민하고 자신의 사단의 일원인 우방궈 장희(이·장!)과 함께 해외 동포용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했는데, 그 뒤 1980년대 중반 귀국한 뒤 MBC에서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여성 시대”를 진행한다.이때도 팝에 관련된 구라는 여전히이었지만 너무 그에 추종한 팬이 많았는데<밤의 디스크 쇼>가 진행 중이던 슬롯의 청취율이 훨씬 높았다.당시 밤 10시~12시까지 프라임 타임에 MBC FM-나·정환, MBC표준 FM-나·뭉세(별이 빛나는 밤에), KBS-김·김미숙/김·피에 삼분됐지만 10대 소녀층에서는 별밤이 가장 인기였지만 남성이나 2~30대 이상은 이·존 팬과 김·김미숙을 많이 들었다.일요일 밤의 공개 방송은 성야와 디스크 쇼가 호각이었다[9], 많은 청소년들이 둘 중 하나를 본 방송을 청취하고 다른 하나를 테이프에 녹음해서 듣곤 했다.[10]그리고, 이문세(이·문 세)이수만(이·스만), 유 레츠(유·욜)등과 함께 MBC라디오 황금 시대를 열었다.이 때 공개 방송에서도 연령(당시 50대)에 어울리지 않게 다양한 저속한 표현으로 소문 나기도 했다.이때도 “연예계의 밤의 대통령”의 역할은 여전히에서 그의 휘하에서 큰 가수들이다.이때 이·존 팬 사단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최·성수, 도시의 아이들[11]등이었다.물론 미국에서 돌아와서 방송하던 80년대의 이종환의 지위는 당시 DJ중 POP의 제왕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그의 공백 기간에 MBC의 김·기독, 2시의 데이트와 KBS의 김·그아은항의 팝 다이얼 등이 주간 타임 팝 전문 DJ를 양분하고 저녁 되면 8시~10시 사이에는 KBS의 팬·잉용의 젊은 팝이 단연 투계용 닭았다.이 시간에 MBC의 “왕년의 인기 스타”백·효은도우이 진행하는 팝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당사의 음악 세계 등 음악 잡지에 FM음악 프로그램의 인기 순위에서는 팬·잉용가 부동의 1위.심야에 전·용효크이 진행된다”1시의 데이트”(25시의 데이트는 일반적인 팝보다는 록 음악 중에서도 프로그레시브 등을 많이 다루다 대중적 인기는 적었다.80년대까지는 국내의 FM라디오 프로그램 편성에서 팝 음악이 가요 프로그램보다 많았다.비율로 65:35정도.이후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가요 시장이 크게 성장하면서 FM에서 팝의 비중은 급속히 줄어들어 2000년대 이후에는 배·철수의 음악 캠프가 혼자 고군분투 혼자 숙청하는 시대가 온다.1.2.1990년대 이후[편집]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자 이미 나이가 환갑에 들어간 탓인지 10~20대 취향의 방송은 당연히 그와 잘 맞지 않았다.199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고 2년여 동안 미주 한인 방송(이·창희가 진행 중이던 라디오 코리아와 다른 곳이다)를 진행하며 1992년 말에 귀국하고 MBC표준 FM밤 8시~9시 슬롯에 단독으로<밤으로의 초대>을 진행했지만 6개월 만에 심야 시간인 오전 0시~2시로 바뀌었다.저녁 8시~10시의 슬롯은 전통적으로 중고 교생과 퇴근하는 회사원이 주요 청취 층이지만 결국 그들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청취율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볼 수 있다.자신은 “본래 나의 시간대는 심야이다”로 의욕적으로 심야 시간대로 옮긴 방송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이 역시 오래가지 않고 하차하게 된다.그래서 어린 시절 그의 방송을 듣던 30~50대 아줌마 좋아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넘어간다.전술한 것처럼 “밤의 디스크 쇼”의 진행 당시 여성 시대의 진행을 병행했다.이때 연기자 최·유라와 진행한 MBC라디오의 “이…정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는 공전에 히트를 기록했다.이 시기,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에 LA한인 방송과 전화 연결로 대한민국의 상황을 정기적으로 말하기도 했지만 나이대가 연령대이라 매우 보수적 정치적 견해를 공개적으로 전면에 내 문제가 되기도 했다.하지만”이…정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를 진행하면서 많은 소문을 만들고 결국 2003년 이후 MBC FM4U에서 아침 9시~11시 슬롯에 방송한<이·존 팬들의 음악 살롱>를 진행하며 다시 소문에 휘말리는 바람에 하차하고 결국 MBC라디오와 인연이 끊어지게 된다.그 후 자숙의 시간을 보내고 TBS에 복귀하고 밤의 프로그램”이·존 팬의 마이 웨이”의 DJ를 맡았다.방송 시간은 당초는 밤 8시~10시 2007년 이후는 새벽 12시~2시에 넘어갔지만 2008년부터는 밤 10시~12시에 고정.그런데 가끔 욕 방송을 하고 경고를 받은 적도 있었다.결국”마이 웨이”는 2011년 11월 가수 이·상우에 DJ자리를 내주고 물러났다.[12]2012년 11월에 나온 보도에 따르면 폐 암 투병 중이라고 한다.결국 2013년 5월 30일 폐 암 때문에 노원구 하계동 자택에서 사망.향년 75세.평소에는 상당한 골초였다.2. 평가[편집]고소한 중저음에서 이야기를 읽어 줄 때는 틀림없이 상냥한 아저씨 같아 올드 팬 중에는 학창 시절의 향수에 의해서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팬이 많다.젊은층에서도<이·정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서 보였던 최·유라와의 절륜의 호흡을 기억하는 팬이 있는 것은 있다.상술한 것처럼 1980년대 전까지는 그의 독보적 위치 때문에 “팝송 하면 이·존 팬”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1990년대 이후에 들어 기초가 얕은 팝 지식에 의해서 그 이상의 매력은 잃은지 오래다.1990년대 초 자신이 단독으로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많이 먹기한 뒤 조사 대상을 30~50대 장년층에 설정하는 전환하고 성공한 것을 보면 그 때까지는 이·존 팬에 대한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던 것으로 나타난다.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편파적이고 권위적인 성찰이 부족한 언행으로 물의를 빚은 것이 많아지면서 중장년층 사이에서도 안티가 꽤 많아졌다.<이·정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최·유라는 처음 진행할 때 그의 기세에 눌려서 거의 울뻔 했다는 얘기도 할 정도였다.2013년 현재가 되어 최·유라는 방송인 가운데도 아줌마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이·정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를 처음 진행한 1990년대 중반 20대 후반의 새댁이었던 최·유라가 환갑을 바라보는 의붓 아버지 같은 이·존 팬에 겁먹은 것은 당연하다.3. 검은 역사[편집]을 읽기 전에 남우이키의 통상의 문서가 그렇듯, 아래의 내용도 100% 믿지는 않는다.특히 오래 전의 일이 세월이 흐르고 서술된 것이기 때문에 왜곡되거나 기본적인 사실 관계가 틀릴 가능성도 있다.아래의 내용 중 카타라 성의 내용과 ” 그랬던 거야.”,”빙산의 일각”등의 표현을 쓴 소문성의 내용도 많아 발키독미도 필요할 거 같아.별다른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내용은 충분히 명백한 거짓일 가능성도 다분하다.이·존 팬들이 이미 고인이 된 이상 그의 인생과 행적이 지나치게 미화됐다면 그것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필요하지만 단순한 악의로 확산된 소문을 사실인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사자 명예 훼손 죄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특히 이하의 “이]사건”은 교묘하게 이정환에 혐의를 걸기사만 편집한 링크임에 주의한다.월간 조선에 흑역사 기사가 존재한다면 그 기사를 정확히 인용하고 사진과 링크를 걸면 좋은 일이지만, 공신력 없는 블로그 링크를 가지고 갑자기 기정 사실화하는 것은 섣불리 판단일 수 있다.물론 아래의 내용이 모두 거짓이라는 의미도 이·존 팬들이 성인 군자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단지 근거 없는 비판은 단순한 비난에 불과하므로 아래 내용을 읽는 위키 사용자와 향후 아래의 내용을 편집하는 위키 사용자에 유의할 필요성이 있다는 얘기다.3.1. 라디오 방송 중인 물의[편집]방송 대내외적으로 검정 역사가 정말 많은 인물이다.위에서 언급했듯이 1980년대 전만 해도 그의 독보적인 위치 때문에 ‘팝송 하면 이정환’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1990년대 이후 들어 기초가 얕은 팝 지식으로 인해 그 이상의 매력은 잃어버린 지 오래다. 1990년대 초 자신이 단독으로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대식가한 뒤 청취 대상을 30~50대 장년층으로 설정하고 전환해 성공한 것을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이정환에 대한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편향적이고 권위적이며 성찰이 부족한 언행으로 인해 물의를 빚는 일이 잦아지면서 중장년층 사이에서도 안티가 상당히 많아졌다. 〈이정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최유라는 처음 진행할 때 그의 기세에 눌려 거의 울컥했다는 말도 할 정도였다. 2013년 현재에 이르러 최유라는 방송인 중에서도 아줌마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이정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를 처음 진행했던 1990년대 중반, 20대 후반의 새댁이었던 최유라가 환갑을 바라보는 장인 같은 이정환에게 겁을 먹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3. 흑역사[편집]를 읽기 전에 나무위키의 통상적인 문서가 그렇듯 아래의 내용도 100% 믿을 수는 없다. 특히 오래전 일이 세월이 흘러 서술된 것이기 때문에 왜곡되거나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틀렸을 수도 있다. 아래의 내용 중, 카탈라성의 내용이나 「그랬던 모양이야~」, 「빙산의 일각」등의 표현을 사용한 풍문성의 내용도 많기 때문에, 발췌도 필요할 것 같다. 특히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내용은 충분히 명백한 거짓일 가능성도 다분하다. 이정환이 이미 고인이 된 이상 그의 삶과 행적이 과도하게 미화됐다면 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필요하지만 단순한 악의로 인해 퍼진 소문을 사실인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사자명예훼손죄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특히 아래의 이수미 사건은 교묘하게 이정환에게 혐의를 거는 기사만 편집한 링크라는 점에 유의할 것. 월간조선에 흑역사 기사가 존재한다면 그 기사를 정확하게 인용해 사진이나 링크를 걸면 될 일이지만 공신력 없는 블로그 링크를 가지고 느닷없이 기정사실화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물론 아래 내용이 모두 거짓이라는 뜻도 이정환이 성인군자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다만 근거 없는 비판은 단순한 비난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래 내용을 읽는 위키 사용자나 향후 아래 내용을 편집하는 위키 사용자에게 유의할 필요성이 있다는 얘기다.3.1) 라디오 방송중 물의[편집]방송 내외적으로 흑역사가 정말 많은 인물이다.위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이·존 팬의 이면에는 “연예계의 밤의 대통령”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연예계의 실력자에 위치한 인물이다.그런데 이것은 좋은 말이 아니다.실제로 1970년대 세시봉 시절부터 그가 데뷔시켜서 스타가 된 인물이 너무 많아 그는 단순한 DJ가 아니라 연예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그 때부터 쌓인 인맥은 아직 방송가의 꼭대기까지 쌓이고 있다는 점.이러한 영향력이 절정이던 1970~1980년대에는 다양한 흉악한 연예 비리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연예계에서 매장당할 것을 우려한 당사자들이 입을 다물경우가 많아 표면적으로 밝혀진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많다.그 중 아래의 내용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물론 당연히 여기 나오는 내용은 포털에서 거의 검색되지 않는다.그나마도 발견되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정도?참고로, 과거에는 스마트 폰에서는 뉴스 라이브러리는 보지 않았지만 현재는 HTML5베이스로 바뀌어 스마트 폰에서도 볼 수 있게 됐다.다만 글씨가 작아서 일일이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 결점이다.그리고 이 사람에게 밉보인 연예인들은 거의 망했다는.대표적으로 사기꾼으로서도 유명한 피터 야마구치겠다는 한일 혼혈 미국인 가수는 1988년에 음반을 냈지만[13]이 사람에게 모종의 이유로 미움을 받아 수억원을 방송가에 뿌렸는데도 방송에 나올 기회를 얻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연예계를 떠났다.지금은 그래서 카지노(갬블러)관련 쪽으로 돌아왔지만, 거기에도 성공해서 다행이야.위에서 여러 차례 언급됐지만 이정환의 이면에는 ‘연예계 밤의 대통령’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연예계 실세로 자리 잡은 인물이다. 그런데 이건 좋은 말이 아니야. 실제로 1970년대 쎄시봉 시절부터 그가 데뷔시켜 스타가 된 인물이 매우 많았고, 그는 단순한 DJ가 아닌 연예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때부터 쌓인 인맥은 아직도 방송가 꼭대기까지 쌓여 있다는 점.이런 영향력이 절정이던 1970~1980년대에는 여러 흉악한 연예 비리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연예계에서 매장될 것을 우려한 당사자들이 입을 다물는 경우가 많아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얘기가 많다.그 중 아래의 내용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물론 당연히 여기에 나오는 내용은 포털에서 거의 검색되지 않는다. 그것도 찾는다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정도? 참고로 과거에는 스마트폰으로 뉴스 라이브러리는 보지 않았지만 현재는 HTML5 기반으로 변경돼 스마트폰으로도 볼 수 있게 됐다. 다만 글씨가 너무 작아 일일이 확대해야 한다는 게 흠이다.그리고 이 사람에게 미운 연예인들은 거의 망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타짜로도 유명한 피터 야마구치라는 한일 혼혈 미국인 가수는 1988년에 앨범을 냈지만, [13]이 사람에게 모종의 이유로 미움을 받아 몇 억원을 방송가에 뿌렸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에 나갈 기회를 얻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연예계를 떠났다. 지금은 그래서 카지노(갬블러) 관련 쪽으로 돌아갔지만, 그쪽에서도 성공해서 다행이다.매우 드문 월간 조선에서 벌어진 주례자 비평에서 심층 인터뷰를 했으나 당시 인터뷰를 하던 기자가 위에 나오는 다양한 검정 역사를 꼼꼼히 물었으나, 이에 대한 이·존 팬들의 말도 안 되는 변명이 일품이다.예를 들면, 박·성원도 단지 자신이 무서워서 갑자기 자살했다는 같은 이야기로 이야기를 풀었다.그렇게 많은 검은 역사를 일궜지만 역설적으로 연예계에서 이·존 팬들을 존경하는 사람이 꽤 있다.MBC라디오에서 이·정환과 오랫동안 인연을 맺은 가수 이·뭉세의 경우 이·존 팬들을 이·영훈과 함께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최고의 인기 프로그램 진행자 때 자신을 정규로 써서 보낸 유명하게 된, 히트 곡도 많이 쓰게 됐다고… 그렇긴사실 이·뭉세는 무명 시절” 달리는 중계차”등의 아역 프로그램의 MC를 전전했지만 이·존 팬들의 영향력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 “별의 야경을 맡아 1980년대 중반에 톱스타의 반열에 오른다 오늘의 위치까지 왔으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게다가 장례식에 문상 온 조·욘삐루가 “이…정환 씨가 들려주는 음악을 통해서 꿈을 키우는 무대를 그릴 수 있었다.나에게는 영웅이었다.방송국에서 만날 때마다 저나 동료, 후배들에게 좋은 것을 많이 하셨다.거짓말은 안 됩니다!컴퓨터 통신 시대까지 위성 방송 안테나 없이 시청 가능한 해외 방송은 미군 AFN Korea(AFKN)밖에 없어서 스마트 폰 세대의 잣대로 폴더블 폰 세대를 그대로 올라가면 부정확하다.아직 고인의 목소리가 생생하다.이종환 씨는 “1960년대 대한민국의 대중 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올리는 것 같다.좋은 음악을 많이 들려줬다”이라고 말할 정도로(…). Y스타에 따르면 이·스만도 찾았다고 한다.현재 대한민국 연예계를 지배하는 사람들로 불리는 이들이 대한민국의 대중 음악사 초기의 공과를 말하고 이·존 팬이 어떤 일을 해도(내겐 큰 이익을 받았기 때문)계속 강력하게 옹호했기에 그렇게 구렁이 담을 넘게 지나갈 수 있으니… 그렇긴그렇게 스스로 남의 불만과 자기 합리화를 일삼아 자신과 코드가 잘 맞는 사람은 철저하게 정리하고 내 눈 앞의 사람은 거품 하나 남기지 않고 매장시켰기 때문에 사후의 인물평은 극과 극이 될 수밖에 없다.완전히 외면하고 버리는 것은 기본에 타협도 않았으니까……문제는 검정 역사적 사건을 제외하더라도 저렇게 보살핌과 살인의 모든 것이 자신과의 연줄이 있는지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제3자 입장에서는 결코 좋은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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